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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테릭스] 낙천주의자 – 밥 지그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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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 ㅣ 밥 지그리스트

글/사진: 조나단 지그리스트(아크테릭스 소속 클라이머, 밥의 아들)

나의 아버지, 밥 지그리스트. 탄탄한 몸과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 외에도, 아버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바로 끝을 알 수 없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날씨가 좋든 나쁘든, 돈이 있건 없건 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아버지에게서 배울 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그런 낙천주의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컵이 반이나 차 있네’ 수준이 아니라, ’3/4이나 찼네’라고 하실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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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운동에 있어 타고난 분이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5.13급 클라이머이자 마라토너인 동시에 히말라야에도 올랐다. 하지만 그 외에도 아버지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성공을 위해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한 특유의 긍정적 태도 말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몸은 늙어가기 마련이지만, 정신만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처음 아버지가 클라이밍을 시작한 건 1970년대 중반, 미국 위스콘신주 데블스 레이크(Devil’s Lake) 근처였다. 사실 그 전까지 아버지는 래프팅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그러다 모교인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캠퍼스의 유명한 아웃도어 모임인 <후퍼스 아우팅 클럽> 회원들에게 로프를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됐다. 가파른 폭포에서 보트와 함께 하강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오랜 클라이밍 파트너인 컬트 크루거는 “당시는 골드라인(주: 2차 대전부터 생산됐던 미국제 선박용 로프로 1950~70년대 등반용으로도 널리 활용됐다)라는 구식 로프를 쓰던 시절이었어. 로프를 몸에 직접 묶거나 5미터 길이의 웨빙끈을 몸에 둘둘 묶어 하네스를 대신할 정도로 열악했지. 하지만 밥은 카약으로 다져진 강력한 완력이 있었고, 덕분에 당시 젊은 클라이머들 속에서도 금세 돋보였어”라고 그 시절 아버지를 떠올렸다.

클라이밍을 향한 열정이 점차 커지면서 아버지는 보트에 대한 관심을 서서히 잃어갔고, 당시 <후퍼스 아우팅 클럽>에서 만난 클라이밍 친구들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아내(이자 나의 멋진 어머니)인 슈를 만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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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져가던 그 때, 아버지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토목환경공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막 밟고 있었다. 학교 수업이 있는 주중에는 크루거를 비롯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연습 삼아 돌로 지은 건물에서 빌더링(주: 빌딩 벽을 오르는 등반)을 하기도 했다.

크루거는 “그때 우린 거의 매일처럼 붙어 다녔지. 일과시간에는 창문 너머 건물 안쪽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빌더링을 했어”라고 회상했다. 이어 “밥은 매사에 열정적이고 성실한 친구”라며, 그런 점들이 아버지를 진정 위대한 클라이머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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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후퍼스 아우팅 클럽> 멤버들은 어느 주말, 기억에 남을만한 원정을 떠났다. 밤새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한 클래식 클라이밍 루트. “1970년대 후반이었을 거야. 미국 뉴욕주에 있는 샤완겅크로 가을 원정을 떠났지. 밥과 나는 이제 막 5.9난이도 등반을 시작하는 수준이었는데, 그곳에서 로즈랜드, 버드랜드 등등 ‘랜드’란 이름이 들어가는 5.9급 루트는 모조리 다 올랐어. 원정을 마치고 다시 장거리를 운전해 매디슨까지 돌아와야 했지만,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 아버지의 오랜 클라이밍 파트너 중 한 분인 론 렌즈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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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에 이어 아버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고산 등정으로 향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긴 아버지의 새로운 목표는 알래스카주 디날리 국립공원의 웨스트립(West Rib)에 오르는 것. 아버지와 크루거 등 3명으로 구성된 팀이 꾸려졌다. 며칠 동안 이어진 끔찍한 날씨 탓에 하이캠프의 텐트 안에서 꼼짝 못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셀파나 포터의 지원 없이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크루거는 그 루트에 대한 각별하고도 특별한 추억이 있다고 한다. “중요한 건 그 때 당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지도, 무얼 찾게 될지 전혀 모르고 무작정 덤볐다는 거지.”

1982년, 이번엔 네팔 동쪽에 위치한 해발 6,800m의 미봉-아마다블람의 남쪽 릿지 겨울 초등을 위해 뭉쳤다. 마찬가지로 셀파나 포터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 5,800m 지점에 위치한 하이캠프에서 근 3주 동안 극심한 폭풍을 견디며 보냈다. 중도 포기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크루거는 여전히 남아 도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정상이 보일 무렵, 크루거에게 극심한 고산병이 찾아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철수를 결정해야만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었어. 혼자 등반을 하러가거나, 아니면 크루거를 도와 함께 하산하는 것이었지.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을 했고.”

당시의 등반 실패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진한 아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실패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심지어 돌아오는 길에 하루 종일 운전하는 것이 어땠는지를 얘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놀랄 만큼 긍정적이었다.

두 차례 고산 등반에 도전하던 시기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암벽 등반에 대한 열정의 끈도 놓지 않았다. 1980년대 초였을 것이다. 데블스 레이크 주립공원의 ‘애시드 락’(Acid Rock)은 그의 첫 번째 5.12급 등반의 대상이었다. 론은 “당시 너무 짜게 굴었던 가이드 탓에 등반 난이도가 5.10c로 기록되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5.12a급이었다고 수긍하고 있지. 그 등반은 밥이 가진 신체적 힘과 남다른 역량, 그리고 4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그 무언가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던 기회였어.”라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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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부모님은 등반 원정에 나를 데려가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인가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 첫 크랙 등반이 3주 앞으로 다가왔구나!”라며 즐거워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윽고 우리 가족은 아름다운 볼더로 가득한 미국 콜로라도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1년에 두 번씩 나를 콜로라도주 ‘플래그스테프 마운틴’에서 열리는 볼더링 데이란 행사에 데려가셨는데, 솔직히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클라이밍을 정말 좋아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후 나 스스로 클라이밍에 대한 열정과 포부를 품게 되면서, 비로소 등반에 대한 흥미도 생겼다. 그 무렵 아버지도 내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내가 클라이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가장 큰 동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산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이었다. 반대로 나의 존재는 아버지가 개인 최고 기록에 도전하도록 독려하는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 부자는 최고의 파트너이자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나의 첫 5.12급 등반에서 빌레이를 봐주었고, 나는 아버지가 첫 5.12+ 등반에 도전하도록 바람을 넣기도 했다.

물론 나는 애당초 아버지의 실력이 지금까지의 등반 이력을 훨씬 능가하고도 남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더 큰 도전에 나서도록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몇 년 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는데, 2014년 6월 내가 먼저 5.15급 초등을 해냈고, 곧이어 아버지 역시 5.13급 초등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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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등반이란 스스로에 대한 진정한 도전이자,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게 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아버지 특유의 낙천주의는 새로운 등반 프로젝트에 돌입할 때마다 빛을 발했다. 가장 최근의 성과는 아주 굉장할 뿐 아니라, 나의 어떤 부추김 없이 스스로 이뤄낸 것이었다.

블루 라이트 스페셜(Blue Light Special, 5.13b). 미국 와이오밍주 텐 슬립에 있는 악명 높은 루트다. 오랜 시간 쌓아온 아버지의 기량을 발휘하기 충분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에 없던 새로운 방법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곳이었다.

첫 며칠 동안은 확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작은 움직임마저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버지는 다른 루트에서 거둔 성공을 떠올리며 7시간을 볼더 위에서 보내기도 했지만, 정말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2년 동안 총 5번의 원정을 떠났는데, 때 이른 여름 폭설로 인해 일찌감치 원정을 포기한 적도 있었고, 갑작스럽게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소식에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총 21일의 도전 기간 동안 매번 똑같은 열정으로 똑같은 준비를 거쳐 똑같은 루트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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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육감적으로 마침내 아버지에게 때가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버지의 원정에 합류해 빌레이를 봐주기로 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지금까지 힘들어하던 구간을 처음으로 통과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후 구간에서 아버지는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가버렸고, 결국 두 차례 정도 앵커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실패 직후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거 멋진데!’였다. 이런 아버지의 반응은 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멋지다니? 이게 실패한 사람이 할 말인가?’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태도 그 자체이자, 그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로프를 매기 전부터 이미 긍정으로 가득 차 있기에, 실패하는 그 순간조차 ‘멋지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불쾌할 정도로 더웠던 다음날, 아버지는 로프를 어깨에 걸고, 신발 끈을 동여 맨 채 다시 도전에 나섰다. 나도 변함없이 빌레이를 봤다. 어느덧 주변에는 우리를 응원하는 무리가 모여들었고, 아버지를 향한 격려의 외침이 절벽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내 친구인 알렉스 하놀드가 몸을 뒤로 한껏 젖히며 외쳤다. ‘우와 정말 대박이에요!’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아버지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다. 나이 67세. 경력 43년. 그 가운데 가장 도전적인 루트. 이 루트의 정상 끝에 지금 아버지를 서있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특유의 끈기와 낙천적인 태도였다. 이런 낙천주의가 떠나지 않는다면, 몇 년 뒤로도, 심지어 70세 이후에도 새로운 암벽에 도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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